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오피니언

기획특집 칼럼 5부작- 의성의 DNA를 찾아서

하태진 기자 입력 2026.09.11 21:16 수정 2026.09.11 21:16

[기획연재 칼럼 5부작] 의성(義城)의 DNA를 찾아서

⓵ 문소(聞韶)에서 의성(義城)으로
문소성주 홍술(洪術)의 결단과 지명의 탄생

지명(地名)은 그 땅의 운명이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 지향점이다. 우리 고장의 이름인 ‘의성(義城)’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체면과 형식을 숭상하며 지어낸 관념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1,100년 전, 후삼국 시대라는 거대한 격동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념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던 한 인간의 실존적 결단에서 비롯된 ‘역사적 실체’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3년(서기 929년) 7월의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후백제왕 견훤이 장수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가니, 성주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왕건)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나의 좌우 팔을 잃었구나’ 하였다.”
image
역사학적으로 이 짧은 기록은 오늘날 우리 의성군민들이 반드시 대면해야 할 두 가지 거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당시 문소군(聞韶郡, 의성의 옛 이름)의 성주였던 홍술은 신라 조정의 명을 받는 수동적인 관료가 아닌, 스스로 군사력과 행정력을 보유하고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던 독립적 ‘호족(豪族)’이었다. 둘째, 그가 당대 최강의 맹장이었던 견훤의 5,000 정예병을 마주하고도 성문을 열지 않은 채 장렬히 산화한 선택은, 맹목적인 군신(君臣) 관계의 충성이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이 제시한 ‘통합과 평화’라는 새로운 시대적 비전에 동참하겠다는 주체적 결단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자신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홍술의 죽음을 기리며, 서기 940년(태조 23년) 전국의 군현을 개편할 때 문소군을 일컬어 ‘의(義)로운 성’, 즉 의성부(義城府)라 명명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유교적 질서는 소중한 자산이나, 그 뿌리에 홍술의 의(義)가 있다"
의성현 조에 명확히 기록된 이 사실은, 우리 고장의 정체성이 선비들의 붓끝이 아니라 ‘주체적 자치 정신’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라는 야성(野性)적 역사관에서 출발했음을 웅변한다.
조선 중기 이후 영남 유학의 융성과 함께 우리 고장은 충(忠)과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적 질서를 확립해 왔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역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선조들이 보여준 그 숭고한 예(禮)의 뿌리에는 언제나 난세에 고을을 스스로 지켜내고 옳은 가치를 향해 전진했던 홍술의 ‘의(義)’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뿌리를 망각한 채 가지에 매달린 꽃만을 칭송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안동과 영주가 구축해 놓은 관념적 유교 프레임의 아류(2인자)에 머물기를 거부해야 한다. 삼국사기가 증명하는 우리 의성의 진짜 DNA는 위기 앞에서 고을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을 졌던 '홍술의 자치적 민주 정신'이다. 이 차갑고도 뜨거운 역사적 팩트 위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미래지향적인 의성의 정체성을 새롭게 건축할 수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홍술의 정신이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구한말, 어떻게 ‘의병(義兵)’이라는 거대한 저항의 역사로 이어졌는지 문헌을 통해 추적해 본다.

 

image

[기획특집⓶]
‘의성(義城)’의 역사적 DNA를 찾아서

고려 홍술의 절개에서 임란 의병, 항일 독립투쟁까지
시대의 불의에 맞선 ‘의성인(義城人)의 소신’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연다
지명(地名)은 단순한 행정적 구분이 아니다. 그 땅을 디디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자,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정신의 집약이다. 경상북도 중앙부에 자리 잡은 ‘의성(義城)’이라는 이름 속에는 ‘의로움을 지켜낸 성채’라는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천년이 넘는 거친 역사 속에서 의성은 단 한 번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강압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수가 눈앞의 안위와 타협할 때도 의성의 인물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붓을 들어 상소를 올리거나 칼을 차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고려 충신 홍술 장군의 절개부터 임진왜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 그리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전국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던 항일 독립투쟁에 이르기까지, 의성의 역사는 곧 ‘의(義)의 숭고함과 결기’의 역사였다.

고려의 절개를 지킨 충신 홍술,
‘의성(義城)’ 정신의 태동을 알리다
929년(태조 12년), 후백제의 견훤은 대군을 이끌고 신라와 고려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의성부(문소성)를 전격 침공했다. 공산전투의 승리로 당시 후백제 견훤의 거대한 세력 앞에 수많은 장수와 호족들이 몸을 사리거나 투항을 고려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홍술 장군은 불의한 침략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섬기던 고려 태조 왕건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태조 왕건은 홍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통곡했고, 그의 숭고한 절의를 기려 이 지역의 정체성을 ‘의로운 고장’으로 역사에 새기게 했다. 자신의 목숨보다 대의와 신의를 우선시했던 홍술 장군의 충절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향후 천년 동안 이 땅을 지탱할 ‘의성 정신’의 당당한 출사표였다.

임진왜란의 피비린내 속에 들불처럼 일어난
의성 의병의 호국혼(護國魂)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참화가 전국을 덮쳤을 때 의성의 들녘은 다시 한번 의로운 피로 물들었다. 조정이 북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관군이 와해되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서, 의성의 선비들과 민초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김용(金湧), 오운(吳雲), 신지제(申之梯), 변종언(卞宗彦) 등 의성의 유학자들은 붓을 내려놓고 의병을 창의(倡義)했다. 이들은 관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향토를 지키고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모으고 민초들을 결집했다. 의성 의병은 낙동강 물줄기와 지역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소백산맥 이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당시 의성 의병의 특징은 특정 기득권이나 문중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이웃을 구해야 한다’는 대의 하나로 신분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남들이 좌절하고 몸을 사릴 때, 소수일지라도 옳다고 믿는 길을 향해 주저 없이 나섰던 의성 의병의 호국 혼은 임진왜란이라는 대란 속에서 나라를 구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구한말 의병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까지
전국 최고 수준의 항일 투쟁사
의성의 의로운 DNA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하여 일어난 의성의병(義城義兵)은 경북 지역 항일 의병 투쟁의 거점이 되었다. 김도현, 이강년 등 의병장들과 연계하며 의성을 중심으로 펼쳐진 의병 활동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맞선 가장 격렬한 저항이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의성의 기상에 불이 붙었다. 비안면, 금성면, 안계면, 단촌면 등 의성 전역에서 펼쳐진 만세 운동은 농민과 학생, 유림이 한마음으로 뭉쳐 일제의 총칼에 맞선 장렬한 민중 항쟁이었다. 나아가 1930년대 일제의 수탈에 맞선 ‘의성농민조합운동’과 신간회 의성지회의 활동은 단순한 만세 운동을 넘어 일제의 식민 지배 체제를 뿌리부터 흔드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으로 발전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 따르면 의성은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전국 손꼽히는 ‘독립운동의 성지’ 중 하나다. 벼슬이나 부귀영화 대신 국권 회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가문과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의성 출신 독립투사들의 족적은 ‘의성’이라는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역사가 증명한 의성의 DNA,
‘따뜻한 소신’과 ‘포용적 상생’으로 피어나야
고려 홍술 장군의 절개, 임진왜란 의병의 호국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피땀은 하나의 공통된 궤적으로 모인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형세가 불리하고 소수일지라도, 옳다고 믿는 가치와 대의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소신 있게 행동한다”는 의성 고유의 역사적 DNA다.
이 깊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로 멈춰 서 있지 않다. 오늘날 의성이 맞이한 지방소멸의 위기와 인구 구조 변화라는 새로운 도전 과제 앞에서, 이 ‘의(義)의 정신’은 다시금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다.
과거의 ‘의(義)’가 외세의 침략과 불의에 맞서 나라와 마을을 지키는 결기였다면,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의성이 보여줄 ‘의(義)’는 “다수결의 관성이나 배타적 집단성에 안주하지 않고, 소수와 신규 전입 주민, 약자의 목소리까지 품어내며 공정함과 상생을 실천하는 개방적 포용성”으로 나타나야 한다.
의성김씨, 해주오씨, 안동권씨, 아주신씨 등 역사적인 씨족사회가 지켜온 숭고한 선비 정신과 명예심은 이제 새로 전입해 오는 이웃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피어나야 한다. 그들이 앞장서 남들이 관성에 따라 안주할 때, 미래를 위해 마을 자치를 혁신하고 귀농·귀촌인과 기존 주민이 어우러지는 ‘상생 조례’를 만드는 대범함 또한 의로움을 지키는 역사의 결과다. 그것은 씨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성’을 지키는 역사적 사명이다.
천년을 넘는 동안 그래왔듯, 의성은 앞으로도 ‘의로움을 지켜낸 성’으로서 스스로의 역사와 정체성을 단단히 지키며, 그 온기로 새로운 이들을 맞아들여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잘사는 의성, 행복한 군민"이라는 시대적 슬로건은 단순히 경제적 풍요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천년 전 고려부터 이어져 온 의로운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기존 주민과 이주민 모두가 공정하고 존중받는 공동체를 완성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은 의성의 탄생부터 이어져 온 의성 고유의 DNA다. 형세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뉘 집의 자손임을 논하지 않고,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의(義)로운 성(城)’이란 호국혼이 바로 의성인의 정체성이 아닐까 한다.



저작권자 새의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