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계평야의 가을은 오전 오후의 벼 색깔이 달라질 만큼 빠르게 익어가고 있다.
단밀면에서 낙단보로 5분 쯤 달리면 우측에 마당넓은 집이 외딴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최현대 도예가가 사는 ‘일월가마’이다.
최현대 작가
그의 첫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치솟아 있다. 얼굴은 야윈 듯 보이나 팔뚝에는 굵은 핏줄이 돋아 저절로 긴장감이 인다. 악수를 청하자 해맑은 웃음을 건네 온다.
일월가마라 적힌 상호 옆 현관문을 열자 맞은편에 5백16개의 잔으로 만들어진 설치 작품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스스로도 모르게 그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것은 최현대 작가가 지난 30년 동안 나무와 풀, 광물 등 자연물들을 실험하면서 얻은 결과물들이었다. 과정의 미학이며 아름다운 결정체였다.
516개 잔 설치작품
그 우측에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자 한구석 남빛의 도자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매끄러운 자기가 아니라 퇴화문으로 일일이 점을 찍어 도두라진 면을 띠고 있다. 구석진 곳에 위치했지만 어딘지 강렬하고 신비한 느낌으로 당기는 힘을 느꼈다. 가야토기 굽다리 잔을 모델로 만든 푸른색 잔에 내린 커피를 마시며 점차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주유 코발트 퇴화문 항아리 38cm x 34cm
최현대는 이도다완(황도)을 재현한 대한민국 사기장 신정희 선생의 제자이다. 30년 전 ‘신정희요’에서 도자기를 시작한 그는 지금껏 계속 연구와 실험만을 고집해 왔다. 천 여종의 나무와 풀과 자연재료를 사용해 유약을 연구했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30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던 것이다.
“도자기는 10년 정도의 시간으로는 세상에 내놓을 만큼 되질 않습니다. 물레질을 익혀야 하고, 흙도 알아야 하고, 불도 알아야 하지요. 그다음에 조형도 공부해야 하니 더디게 이룰 수밖에 없지요.” 커피를 마시며 그가 말한 ‘우주’에 관한 그의 철학이 바로 그 짙은 남빛의 도자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보이저호에서 본 지구가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으로 보였던 것은 인간도 먼지처럼 작은 것이란 이야기다. 인간도 인생도 작은 먼지에 불과한 존재란 것이다. 자칫 인생의 허무함으로 느껴버릴 수도 있는 지점에서, 최현대 작가는 그것을 극복하는‘영원한 항해’를 하기 시작한다. ‘영원한 항해’라는 작품에서 그릇이란 무릇 ‘한 생명을 또다른 한 생명에게로 옮기는 배’란다. 우리는 밥그릇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고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매개체 ‘밥’을 위해 영속적 항해를 한다.![]()
-영원한 항해 84cm x 86cm
결국‘우주’에 비해 인간은 터무니없이 작은 존재지만 하루 3끼의‘밥’을 먹어야 하고 ‘영원한 항해’를 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존재들이다.
가진 집도 땅도 모두 쏟아 부은 최현대 작가의 작품엔 확연히 우주의 색깔과 역동의 문양들이 작품 하나하나 진하게 남아있다. 최현대 작가의 작품들은 막눈이의 감성에도 뚜렷한 고유성을 가진 예술품들이다.
“의성에 오게 된 것은 고성 삼산중학교(폐교)에 있던 제 작품 전시장을 잃게 된 때문입니다. (옮길 곳을) 몇 달간 찾다가 이곳을 발견하고는 바로 결정했죠. 저는 (의성 단밀에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단밀은 도자기의 고장 옛상주 즉 낙동 상주목에 위치해 의성의 맨 끝자락에 있다. 단밀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기그릇 조각이 한둘 나오는 것은 예사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단밀에 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도예가 최현대는 늦은 결혼으로 슬하의 아들 형제가 아직 어리다.
작가를 만나다2
의성 특유의 낮덥밤추(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10월의 가을녁에 최현대의 일월요를 다시 찾았다. 그는 단밀에 와서 산책을 즐긴다. 낙단보 정자에서 낙동강물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가 만든 도자기 드맆세트에 커피를 갈아 내리며 작가는 두 가지 미학 체계로 작업 한다며 자신이 창안한‘밥의 미학’과 ‘지구의 미학’을 이야기 한다.
‘밥의 미학’Bop's Aesthetics은
“밥의 곡식과 채소와 과일은 나 아닌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내가 아닌 남을 살리는 데 있으며 그 이유로 끝없이 생을 거듭한다.
이제 맛을 즐기고 탐하는 마음을 넘어 맛으로 전하는 그들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의 대명사인 밥을 먹으면서 그 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정의하며 이것을ㅡ‘밥의 미학’Bop's Aestheticsㅡ 이라 한다. 고 했다. 또 자신이 창안한 밥의 미학 이전을 '차의 미학' 시대라 칭하며 밥의 미학은 차의 미학을 포용한 개념의 미학이다. 라며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밥이 주는 이타적 마음을 느끼고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최고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불합리한 요소를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의 동력을 얻어낼 수 있다. 이것이 '밥의 미학'을 창안한 이유이다.“ 고 말했다.
‘지구의 미학’Earth's aesthetics은
“지구의 미학'은 지구 밖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인식적 미학 개념이다.
인류가 지구 밖으로 나갔을 때 지구는 아름답고 푸르며 국경이 없는 완전한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우주 어느 외곽의 조그만 행성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광대한 우주로의 의식적 확장을 경험 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확장 되어야 하며, 그 넓어진 시각으로 우리와 우리의 일들을 바라보아야한다“ 는 것이다. 이에 ‘지구의 미학’ 개념을 창안한 이유라 한다.
최현대 작가의 작품들을 마주하면 매끄럽고 반짝이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투박하고 거친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와 가야토기에서부터 청자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달항아리까지 1만년 우리 고유의 도자기 역사를 두루 거치고 있다. ‘우주 그 울림’이란 작품에서 “김광균 시인의 시 ‘외인촌’의 구절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를 떠올리며 유약을 푸른색 점으로 한점 한점 찍었단다.![]()
-우주 그 울림 54cm x 37cm
그리고 조형은 강서대묘의 현무도, 아리랑 선율, 신라의 범종, 승무, 저고리나 처마의 곡선처럼 우리 민족 전통의 선에 닿아있음이 느껴진다. 또‘우주유’라는 신비로운 유약을 완성시겼는데 그 변화무상함이 마치 재임스웹 망원경으로 보는 우주의 모습을 닮았다. 그 안에는 천여 종 식물의 생명이 산화돼 있다. 가마 밖 유약 통만 얼핏 삼십여 통이 넘는다. 최현대 작가는 내년쯤 서울에서 전시회를 통해 우주유라는 장르의 도자기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
작가 유약 시유사진
일월가마에는 고성에서 가져온 작품들이 여장도 풀지 못한 채 담벼락에 가득 기대어 있다. 미술관을 만들어야 할 만큼의 진귀한 실험작들이 전시할 공간이 없어 그냥 방치된 느낌이다. 필자는 그것이 안타깝고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최현대 작가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속에 작가의 경지와 인내의 내공이 느껴진다. 최현대 작가는 시 계간 전문지 ‘주변인과 시’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그의 작품에는 시적인 서정이 가득하다. 도예에 몰두할수록 시간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배울 게 너무 많다고 한다. 마치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한 길로만 치달은 최현대의 인생은 추수를 앞 둔 가을처럼 설렘의 황금 물결이 일렁인다.
일월요를 나서다 문득 출구 옆의 기묘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작품인지 묻자 최현대 작가는 껄껄 웃으며 큰 아들 달해가 6살 때 만든 작품이라 말했다. 아버지가 도판 작업하다 남은 깨진 조각들을 주워 만들었는데,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표현했다고 제목이 ‘꽃잎이 바람에 날려요’란다. 그 옆에 또 다른 달해 군의 작품이 있었다. “이건 달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든 겁니다. 나름대로 생각을 잘 표현하는구나 싶어 전시해 논 건데 제목은 ‘우주전쟁” 이라고 한다.![]()
-꽃잎이 바람에 알려요 60CM X 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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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전쟁 120CM X 60CM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필자는 아들 달해군의 작품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최 작가님보다 아드님이 먼저 출세하겠는데요”라고 칭찬하자 최현대 작가는 “그럴지도 모르지요”라며 맞장구를 친다. 단밀의 해으스름 가을 들녘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메아리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