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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작가를 만나다 시인 김은수

하태진 기자 입력 2024.01.15 10:21 수정 2024.01.15 10:21

김은수의 시를 산책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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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직시인 김은수
김은수는 직업란에 ‘시인’이라 적는다. 그는 흔히 작가나 문학인이라는 익명의 문화계급을 거부한다. 엄밀히 ‘시인’이란 직업은 없지만 삶의 원동력이 돈이란 면만 강조되는 시각을 벗어나 보면 ‘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란 의미다. 그는 시인들이 흔히 갖는 호(號)도 갖지 않았다. 그가 만든 ‘은점 시문학회’로 제자들에게 시 쓰는 일을 가르치지만 거의 모든 비용을 자비로 감당하고 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이라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쉽게 볼 수도 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를 두고 혹자는 ‘시란 길가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라 설명한다. 김은수 시인은 그 말처럼 살아왔고 그 말처럼 시를 쓰고 있다. 대구, 경산, 성주, 의성, 서울 등에서 시 쓰는 방법을 가르치고 발표한다. 의성읍 공생병원 옆에 있는 은점 시문학 사무실에선 오늘도 김은수 시인이 작시 강의를 위해 빈 강의실에서 시작 노트를 챙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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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을 낮춘 ‘의미시’
“시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연필이라고 생각해요” 김은수 시인은 흔히 형이상학의 지적 유희쯤으로 치부되는 시의 문턱을 과감히 낮췄다. 아무나 시를 접하고 누구나 시를 써 자기를 알리는 대중문학의 능동적 참여를 주장한다.
마이크를 잡으면 말이 길어지는 노인들은 그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자기인생의 파노라마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서 시란 똑똑하고 잘난 삶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짧은 글 속에 압축된 인생의 디테일들을 전달하는 보고서이다. 그는 그것을 중의적 표현의 ‘의미시’란 말로 설명한다.
시인 김은수는 시가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이나 자극하는 여성적 관념에서 벗어나서 사회와 인생의 문 앞에 서면 마냥 작아지는 경향을 저어한다. 때문에 그는 시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들에게 장미꽃의 아름다움에서 수많은 병충과 비바람을 견디어 낸 결과를 말하는 이중적 의미를 가르친다.
시인 김은수는 문학계 처음으로 ‘의미시’란 용어를 만들었다. 누가 ‘내 인생은 장미꽃이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장미의 아름다움을 위한 끝없는 노력과 인고를 동시에 포함한다는 것이 ‘의미시’란 이야기다.

시를 위해 준비한 청년 김은수
김은수 시인은 비안이 고향이다. 교육을 위해 대구로 가서 대학을 마치고 군복무를 한 후 직장(총무처 공채 집배원)을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춘기의 아노미를 겪으며 일찌감치 시인의 길을 염두에 두었다. 그의 자서글에서 중2 때 부자와 권세가와 시인을 놓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한다. 소년 김은수는 그 세 가지 길을 놓고 누가 더 행복할까 생각한 후에 시인의 삶으로 낙점을 찍어두었다. 환갑을 넘긴 지금도 그는 시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앞서 ‘천직시인’이라 밝혀 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으로 사는데 집배원 생활 32년은 큰 보탬이 됐다. 당시 우편 집배원은 단지 우편물 전달뿐 아니라 그 집안의 내력을 알 수밖에 없던 직업이었다. 글을 모르면 대독자로, 민원이 있으면 대행자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들이 애타게 원하고 기다리던 희노애락의 전달자로서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팠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공무의 한 부분이고 메신저일 뿐이지만 시인을 준비하고 시작(時作)을 탐하던 청년 김은수에게는 괴테의 ‘파우스트’였고 릴케의 ‘인생’이자 최인훈의 ‘광장’같은 나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마셨던 대포 한잔은 바로 명동의 ‘은성’이었고, 그들을 이해하려 애썼던 마음은 후일 ‘상처난 자리에 피는 꽃’으로 ‘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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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시인의 삶을 반영한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버리고 행복한 삶을 추구해 걸어온 김은수 시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시의 세계에 점점 심취했을 때 병마에 부인을 잃게 됐다. 집배원 생활을 통해 희노애락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다져왔다지만 마야코프스키의 ‘사랑의 범선은 인생에 좌초했다’. 그 후 슬픔보다 깊은 김은수의 시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한층 강해졌고 먼저 간 아내에게 삼천배(三千拜)를 올리고 나서야 불교의 진리를 시벗으로 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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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알리고 시를 쓰는 지금의 생활이 행복합니다. 후배를 양성하고 시를 통해 자신과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어르신들을 위해 매진하려 합니다. 시가 오직 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를 만드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시인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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