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장맛비를 보며 문득 노자의 《도덕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이다.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리고 결국 바다에 이른다.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고,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는 조용히 스며든다.
그렇게 바위를 뚫는다.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유연하지만 흔들림 없이. ![]()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시작 전부터 정치적 격랑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조용하다. 그러나 고요하다고 멈춘 것은 아니다. 깊은 강물일수록 수면은 잔잔하지만, 그 아래로는 쉼 없이 흐른다. 국민은 새 정부가 겸손하고, 유연하게, 그러나 일관되게 나아가길 기대하고 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흐르는 물처럼, 겸손하고 유연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그렇게 흘러야 강을 지나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다시 보라
물은 다투지 않는다. 밀려서 흐른다. 그러나 그 방향은 늘 바다를 향한다. 그 속성은 국정 운영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어떠했던가. 전 정부에서 개혁의 주체였던 이들이 새 정부에서는 개혁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국정도 굽이치며 나아가되, 국민을 향한 방향은 잃지 말아야 한다.
물은 이미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 다양한 물줄기를 품는 유연함, 바다처럼 넉넉한 포용력, 그리고 모양은 바뀌어도 본질은 지키는 일관성 등 물은 언제나 물이다. 컵에 담기면 물컵, 주전자에 담기면 물주전자일 뿐, 겸손하고 유연하되 본질을 지키는 태도—그것이 바로 물이 전하는 지혜이다.
세계는 지금 급류처럼 자국 우선주의로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상선약수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이다. 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넉넉하게 감싸는 포용의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물은 우리에게 또 몇 가지 교훈을 더 해준다.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사람의 몸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피가 돌지 않으면 병이 오듯, 소통이 멈춘 조직은 곧 병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은 단순한 속담이 아니다. 윗물로서 맑지 못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시간이다.
“법대로 하자”는 말의 ‘법’자도 ‘물 수(水)’와 ‘갈 거(去)’로 이루어져 있다. 물 흐르듯 깊고 낮은 곳을 먼저 메우는 것이 국정이자 세상의 이치이다.
이제는 흐르는 물처럼 살아야 할 때다. 겸손하게, 유연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그러나 새 정부가 아무리 겸손하고 유연하게, 일관되게 국가 정책을 추진한다 해도 국민이 함께하지 않으면 바람이 없어 축 늘어진 깃대 위의 깃발처럼 의미없는 구호일 뿐이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여야 비로소 흐름이 되고, 그 흐름이 강물이 되고 이윽고 바다로 나아간다. 빗방울 하나하나는 누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함께해야 흐를 수 있다는 본능이 더해져야 바다로 나아간다. 그래야 이 강은 멈추지 않고, 더 깊고 넓게, 바다를 향해 흐를 수 있다.
국정도 마찬가지다. 국민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정부의 선한 의지 위에 국민의 자발적 동참과 신뢰가 더해져야 크고 멀리 나아갈 수 있으며 끝내 한 바다에서 함께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직업군인이었던 나는 한때 ‘상선약수(上善若水)’와는 거리가 멀었다. 겸손한 ‘척’은 곧잘 했지만, 속은 고집불통이었다.
“좀만 둥글게 살아봐”라는 전우의 조언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상하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함께하면 1시간이면 될 일을 며칠씩 끙끙대며 혼자 하려 들었다.
“협조를 받느니 내가 직접 한다”는 자기 만용은 종종 조직에 물의를 빚었다. 그런 나를 전우들은 물처럼 소리 없이 감싸주었다. 덕분에 조직이라는 큰 물줄기 안에서 거슬러 오르기보다는 함께 흐르는 물의 지혜를 배웠다. 칼끝처럼 싸우고 대립하는 그 모든 것들도 시간의 강을 함께 흘러 결국 함께 바다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흐르는 물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운명적 존재라는 것을.